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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원우 성공수기

임경수 동문 공모작

  • 작성자김민지
  • 등록일2014-11-25
  • 조회수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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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수기 공모전이라는 내용이 개인 메일로 도착 했을 때 많은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글솜씨도 부족한 내가 잘 할수 있을까, 이것을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나하는 걱정이 앞선다

2008년 sub-prime mortgage (서브프라임모기지) 발단으로 전세계 금융위기가 찿아왔다.

대학원 4학기를 이수하는 시점이고 졸업 논문을 작성하던 시기였다

근무하던 회사가 화재로 인하여 큰 손실을 입었고 납품업체인 현대 자동차에서 생산차질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76살의 대표이사는 회사를 포기하고 매각을 결정하여 어수선한 상태로 몇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수없는 고민 끝에 회사를 설립하기로 하고 아내한테 상의를 하였더니 왜 하필 어려운 시기에 창업을 하려고 하느냐 펄펄뒤고 난리가 아니다.

수원 장안대학에서 강의요청이 있던 시기였다.공부를 더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지만 생활이 될까하는 의문이 가장컸다. 가장어려운 시기에 창업을 하는것도 쉬운일은 아니지만 내나이 50살되는 나이고 지금 잘못되면 더 어려운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에 잠을 이루기가 어렵다. 모든 조건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앞으로 어떻게 할것인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늦지만 지금이 빠른 때이고 대학원에서 원우회장을 맏아서 무리없이 잘 끌어왔고 경영대학원 산악회에서 부지런히 몸만들기를 하며 지리산 종주를 하고보니 도전에 자신감이 있고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이 아닌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2008년 6월24일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의 첫글자 “아주”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회사상호를 “아주 수출포장”이라는 법인을 설립하고 중국어도 모르는 상태애서 여행 중국어라는 조그마한 책자를 손에쥐고 무작정 산둥성에 있는 청도로 배를타고 갔다.중국에 아무런 연고도 없고 무슨 객기로 그렇게 갔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아주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얼마나 큰힘이 되는지 모른다.

중국에서 손짓과 발짓으로 여행도 하고 시장을 기웃거리고 기계업체를 찿아 상담도 하고 산둥성에 있는 청도,연태,제남을 다니면서 관광도 하고 차도 마시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다시 귀국을 하여 울산 언양에 있는 회사로부터 중고기계를 매입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다 2008년 10월 계약하고 잔금까지 지불했는데 기계를 판매한 사람은 기계를 내주지 않아서 생산 판매하지 못했다.손실이 늘어난다. 먼저 생산하는 업체한테 제품을 매입하여 판매를 하기로 했지만 금융위기로 인하여 환율이 오르다 보니 판매단가가 높아졌다 석유화학 제품이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다 이윤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은 화학제품이다

2008년 12월 계약한 기계설비가 오지 않는다4개월이 지났다, 판매를 한 엔엘단프라 대표는 삼성과 관련된 모기업에서 공장부지를 매입했는데 설비가 있어야 보상을 많이 받는다고 설비를 내주지 않는다 너무나 난감한 상황이다 직원들을 구해놓고 생산하지 못하고 고정비는 늘어간다. 그렇게 2009년 이 돌아왔다 소송을 해야하는지 걱정이다 겨우겨우 설비를 인수하여 2009년 4월 기계를 수리하여 5월25일 기계를 가동하였다 너무나 벅찬 하루였다 그것도 잠시 생산을 담당하였던 직원들이 생산기술을 모른다고 툭하면 안나오고,지각하고,다시 달래고 술사주고 용돈쥐어주고 너무나 힘든다.인도네시아에서 수출오더를 받았는데 생산하는 직원이 자기 없으면 생산이 어렵다고 출근을 하지 않는다.

전 직장에서 전무이사로 있을때는 이러한 속내용을 잘 알지 못하였다 이런 것이 소기업의 한계인가.생각차이가 너무나 크다 2009년 6월 15일 월요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회사를 향하던중 회사근처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누가 밭에서 비닐을 쓰레기 비닐을 태우는가 싶다 가까이 갈수록 연기가 많다.

가슴이 두근 거린다 회사 가까이 도착하여 보니 우리회사 아닌가 머리속이 하얗다 부리나케 콘테이너 기숙사에 외국인들을 깨우고 공장문을 따고 들어가 미친 듯이 불을끄고 소화기 25개 정도를 사용했는데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거의 실성한 사람같았다 한다.

전기 누전이었다 2억원 가까이 손실이 났다.화성시 팔탄면 안덕우리 노인 분들이 양동이를 가지고 불을꺼주고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몇일후 동네 노인회를 막걸리를 사들고 찿아가 인사를 했는데 “불이나면 앞으로 잘될꺼야”라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왜그리 공허하게 들리는지.... 그후 낮에는 그으름을 닦고 영업을 하고 회사소파에서 잠을 자면서 화재로 인하여 다 타버린 전선이고 설비를 정리하고 고된 일상이 시작 되었다 앞으로 잘될꺼야 라는 생각을 하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학교 행사는 왜그리 많은지.화물차를 끌고 납품갔다 오던길에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학교 행사에 참석하고 다시 옷을 갈아입고 회사로 돌아와 화재를 수습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몇 개월이 흘렀다.

그덕분에 이젠 제품을 10년넘게 생산한 기술자보다 내가 생산을 더잘한다.

직원들을 다시뽑아 교육하고 회사 상호를 “아주 프라텍”으로 변경하여 제2의 도약을 했다 설비를 1대를 추가 계약했다 3억 4천만원 압출설비가 왔는데 계약하고 너무나 다른 설비가 온게 아닌가 너무다른 내용을 이야기 하니까 원래 그렇다고 우긴다.

기계 제작업자가 제작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기계부품을 너무 하급으로 사용하여 생산성이 떨어진다

여러번 수리를 하고 다시 생산을 했는데 제품이 잘 나오지 않는다.또한번의 시련이 왔다.결국 수원지방법원에 기계반환소송을 걸고 1년만에 조정을 통하여 4000만원을 공제하여주고 합의를 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경험을 한다 글로써 다 표현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나이 50살에 창업을 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그어려움을 잘 견딜수 있는 것은 학교생활과 동문들의 관계을 통하여 얻은 긍정의 아이콘이 아닌가 한다

2008년4억, 2009년11억, 2010년,29억, 2011년40억, 2012년45억, 2013년48억, 을 달성했고 2014년 55억(예정)을 예상하고 있으며 2012년에 화성시 양감면에 20억을 주고 1100평의 공장도 마련했다.특허4건과 의장등록 3건을 출원 하였고 현제 3건의 특허를 진행중에 있으며 2014년 7월 15일 중소기업 청장상을 수상했다.

2014년 5월 중국에서 압출설비 3호기를 들여와 설치했다 많은 중국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오면서 기계를 잘 저렴한 가격에 만들었다 지금도 중국의 기업인들과 관계를 잘 유지 해오고 있다.아주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이런 결과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것은 아주 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선택한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생활과동문간의 네트워크도 너무 중요하다.

강의중에 얻어지는 지식을 배우고 선배와 후배의 어울림속에 용기를 가졌다. 또한 경영대학원의 산악회에서 인내와 끈기를 배웠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수 있는 지혜도 얻었다 아주대 경영대학원의 선택은 내 인생의 가장잘한 선택이 아닌가 싶다.지금도 부지런히 동문들의 모임에 참석한다 아주대 경영대학원은 나의 희망이고 등불이다.

아주라는뜻은 국어사전에 “보통 정도보다 훨씬 더 넘어선 상태로”표기되있다

.아주인은 보통보다 휠씬 더 큰 어려움을 넘어설수 있다 모든 상황이 녹녹치 않다.앞으로도 국가 경제는 어려움이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어려움을 잘 극복하면 분명히 좋은 일이있다.

산행을 하면서 정상만 쳐다보고가면 금방 지쳐버린다 앞만보고 꾸준히 노력하다보면 어느새 8부 능선에 있다 그리고 정상이 보인다 인생이라 그런 것 같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상에 오르기까지 꽁짜는 없는 것 같다 나의 이야기가 현제 어려움을 겪고있는 우리 동문들게 조금이라도 희망이 되었으면 한다. 아주라는 단어가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아주대 경영대학원 MC39기 임 경수.

現(주)아주 프라텍 대표이사 임 경수